교사들의 처절한 몸부림: 준사법권 부여 주장에 대해

0.

참 처절하다. 처절하다 못해 처량하다.

 

1.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의 학생인권조례 때리기 1가 끊이지 않고 보수 언론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교총은 무려 생활지도 담당 교원에게 ‘준사법권을 부여하라’는 요청을 하고 나섰다. 2


사실 이건 지금 막 나온 이야기는 아니고, 지난 2월에 학교폭력으로 인해 자살한 중학생에 대해, 교사가 직무유기로 사법처리될 것이라는 말이 나온 직후에 안양옥 회장이 대외적으로 했던 발언이기도 하다. 이번엔 보다 본격적으로, 교과부와의 협의위에서 이 주장이 나온 것이다.


물론, 검토할 필요도 없다. 당연히 미친 짓이다. 체벌 금지의 당위성을 주장한 글에서도 썼듯, 교사의 권한은 이미 지나치게 강하다. 나는 해당 글에서, 대부분의 교사들은 다른 어떤 공적 기관의 감시나 제재를 받지 않기에, 권한 남용이 발생했을 경우 대처하기가 대단히 어렵고, 이를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도 없으며, 교사에게 그런 정당성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교사에게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여 사적 제재를 가할 권한, 즉 체벌을 할 권한을 주어선 안 되며, 이른바 ‘교권의 추락’은 오직 체벌에 의존해 학생들의 기본적인 권리를 억압해왔던 비정상적인 환경이 ‘정상화’되는 과정이라고 적은 바 있다.


그런데 체벌을 금지하기는 커녕, 오히려 반대로 그들에게 더 많은, 다른 제재로부터 자유로운 권한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교총이다. 서울신문의 기사 3에서, “김동석 교총 대변인은 ‘교사가 학교폭력 예방에 적극 개입할 수 있도록 교사에게 준사법권을 줘 학생인권조례 등으로 실추된 교권을 되찾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취지’”라고 말한다. 학생인권조례가 왜 만들어진 것인지, 그 취지나 의미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데다가(물론 이해할 의지도 없으리라 보지만), 최근 불거지고 있는 학교폭력의 책임을 ‘학생인권조례’ 탓으로 돌리고 있는 대단히 저열한 발언이다.


먼저, 학생인권조례는 그 이름으로부터 알 수 있듯 학생의 인권을 보호하고, 보장하기 위한 조례이다. 수십 년간 학생의 인권은 교사에 의해 짓밟혀왔다. 일기장 검사부터, 소지품 검사, 체벌, 머리카락 길이 제한, 언어폭력 등, 교사들은 학생과의 권력관계에서 항상 우위를 차지하고, 너무나도 간단히 학생의 인권을 침해해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학생들의 인권에 대한 논의나 고찰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학생 인권의 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교사들은 체벌로 응해왔음을 기억하라. 오랜 기간의 싸움이 겨우 낳은 결실, 그것이 학생인권조례이고, 이를 통해 비로소 학생들은 스스로의 천부적 권리를 지킬 방법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왜 학생들의 인권이 이렇게 침해되어왔고, 조례까지 만들어야 할 상황이 되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교사들에게 너무 큰 권한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교사가 행하는 체벌에는 기준도 없고, 지속적으로 감독하는 사람도 없으며, 후에 책임을 지는 사람도 없다. 경찰도 함부로 민간인에게 손을 댈 수 없는데, 교사는 너무나도 쉽게 폭행을 행사한다. 헌법에 명시된 인권을 지극히 자의적인 판단으로 침해할 권리가 일개 교사에게 있는가? 교사를 과연 일정 합의에 따라 개인의 권리를 제한적으로 침해할 수 있도록 용인된 ‘공권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교사의 권력은 오히려 축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할 판에, ‘특별사법경찰권(준사법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총은 상황파악을 못해도 너무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교총이 교사에게 부여할 것을 주장하는 준사법권이란, 임의 동행이나 체포 등 인신구속을 제외한 현장조사, 자료영치, 압수수색 등 일정한 수준까지의 권한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교총의 안양옥 회장은 지난 2월, 준사법권을 교사에게 부여할 것을 주장하며 ‘수사권과 전문화된 수사 부서도 없이 객관적 사실에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준사법권이 부여되면, 학생을 특정 교실로 소환하거나, 소지품을 임의로 검사하거나 압수할 수 있고, 학부모를 강제로 소환할 수도 있다. 근데, 과연 준사법권 부여가,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학교 폭력을 막는데 직접적인 도움이 될까?


학교폭력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다. 이미 아주 오랜 시간 학교내엔 폭력이 자리했다. 일진회의 존재가 대두된 것도 2005년의 이야기다. 그때 학생인권조례는 없었다. 사실상 초(헌)법적인 권리를 가졌던 그때 당시 교사들은, 학교폭력의 방지를 위해 학생을 교무실로 불러내어 사건의 정황을 캐묻거나, 소지품 검사/압수, 학부모 소환, 체벌 등에 어떤 제재도 받지 않았다. 당시에도 학교 폭력 문제는 지금만큼이나 심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교사들은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학교 폭력이 발생할 경우 가해자를 불러 교내 봉사를 시키거나, 혹은 그 자리에서 체벌을 가하고 끝내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전 글에서도 썼지만, 이런 대단히 안이하고 무성의한 교사들의 태도가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학교폭력을 조장한 것이다. 이는 학생인권조례 탓이 아니며, 권한이 축소된 (사실 권한이 축소되었다고 표현하는 것도 웃기다. 헌법에 따르자면, 그들은 처음부터 그런 권한이 없었어야 했다) 탓도 아니다. 학교폭력이 근절되지 않은 데엔 교사들 본인들의 책임이 대단히 크다는 것이다. 지금 그들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무능을 ‘학생인권조례’ 탓으로 돌리며, ‘적절한 권한이 없어서’라고 정당화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총은 학생인권조례로 인한 교권 추락 운운하며, 마치 그들이 예전과 같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으면 학교폭력을 뿌리뽑을 수 있을 것처럼 말한다. 그들은 틀렸다. 능력도, 의지도 없는, 또한 기본적인 인권 의식이 없는 그들에게 있어서 지금보다 더 큰 권력은 단지 그들의 사적 욕구와 게으름을 추구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통제받지 않는 거대한 권한을 그들이 지난 수십 년간 어떤 방식으로 사용했는지를 돌이켜보면, 그들에게 다시 또다른 종류의 권력을 부여하는 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학생인권조례를 통해 어렵게 얻어낸 질서와 권리가 다시 붕괴될 우려가 너무나도 크다.


2.

앞서 말했듯, 이런 그들의 움직임은 처절하다 못해 처량하다. 수십 년간, 폭력을 통해 공고하게 유지되어온, 교사-학생이라는 부당한 권력관계는, 최근에 와서야 겨우 무너지려고 하고 있다. 과거에 교사들은 논리적 근거나 당위성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이 무작정 ‘따르라’고 강요하고, 이 명령을 학생이 이행하지 않을 경우 체벌을 통해 강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런 절대적인 권력, 학교라는 폐쇄된 공간 안에서 굳게 형성된 기득권이 무너지려 하고 있다. 이런 변화의 과정, 다시말해 ‘정상화의 과정’이, 교사들에게는 대단히 비위상하는 일이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최근 보이는 모습은 너무나도 추하고 한심하다. 왜 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졌는가, 그들에게서 왜 권력을 빼앗아야 했나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다. 오로지, 그들이 잃은 것이 무엇인지 계산하고 필사적으로 이를 되찾으려 하는 노력뿐이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교권 추락’이라는, 그들이 즐겨 쓰는 표현으로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스스로를 하늘 같은 절대자로 여기던 낡은 관념이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런 그들의 모습들, 사적 욕망을 위한 기득권 유지에 혈안이 되어 있는 그들의 모습들은, 학생 인권조례의 존재의 필요성, 그리고 그 당위성에 더 힘을 실어준다. 교사는 결코 공익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들도 일반인과 다를바 없는, 개별적 욕망과 때때의 감정에 충실한 인간들일 뿐이다. 그런 그들을, 대체 어떻게 믿고 ‘준사법적 권한’을 부여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을 어떻게 믿고 학생에 대한 체벌을 허용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교사들에게 바라는 바는 간단하다. 교사의 본분을 생각하라. 그리고, 학생의 가치를 인정하라. 교사에게 필요한 건 초헌법적인 권력이나, 특별경찰사법권이 아니다. 학생을 권력구조의 하부에 위치한다고 보는 계급의식, 권력의식, 그리고 기득권 의식. 그대들의 추락한 교권을 회복하고 사회적으로 존경받기 위해선, 먼저 교사들 자신부터 지난 수십 년에 대한 뼈저린 반성과 성찰을 해야 할 것이다.


파시즘: 불안, 불신, 불만, 그리고 불확실성의 일본 사회

1.

일본 오사카시의 시장으로 하시모토 토오루橋下 徹 씨가 취임한 건 지난 12월의 일이다. 그는 시장이 되기 전엔 2008년부터 오사카부의 지사로 직무를 수행해왔고, 폭력단과의 스캔들로 인해 2011년 11월 사임했다.현재는 지역 정당이자 현 오사카부/오사카시의 다수 정당이자 우익 정당인 오사카 유신회의 대표이다. 그는 오사카의 재정상태가 위기임을 선언하고 공무원의 수당을 큰 폭으로 깎는 등의 정책을 수행했다. 또한 ‘지사직이라는 독재자적 직책을 민주적으로 통제받기 위해’ 정보공개실을 설치하는 등 개혁적 행보를 보였으나, 그의 극우적 성향은 뒤이은 행보에서 여실히,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일본국 헌법 제 9조는 군사력의 포기, 그리고 침략적 전쟁의 부인을 명문화하고 있다.1 그런데 하시모토 씨는 헌법 제 9조를 개헌할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한다. 그는 지난 2월 트위터에서, 헌법 9조의 개헌 필요성을 주장하며, “(..)하지만, 일본에선, 지진재해에 그렇게나 단결과 협력을 부르짖었음에도 불구하고, 폐기물 처리는 모두 거절. 모든 건 헌법 9조가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2라는, 논리성이 완전히 결여된 말도 안 되는 트윗을 했다. 그는 또한 지난 24일, 보도진에게 “2년을 들여 의논하고, 국민투표를 한다. 거기까지가 오사카 유신회가 주장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한편, “일본국의 모습을 특징짓는 천황제와 같은 레벨의 문제”라는 인식을 나타내고, “일본인 전체가 헌법 9조를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오고 있다”라는 말로, 헌법 9조 개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3

그는 2008년 도지사로 재임할 당시, 전국학력평가에서 오사카부의 성적이 저조한 것을 보고 오사카부의 교육이 비상사태임을 선언, 이른바 교육계획을 구상한다. 하시모토가 가진 교육론의 토대를 이루는 것은 ‘규제’ 그리고 ‘강제’이며 (“‘교육이란 2만% 강제’다” 4), 교육의 정상화를 위해선 일단 공무원인 교사들을 엄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고 믿고 있다. 그 결과가 ‘오사카부 교육기본조례’이다. 이 조례는 교육행정에 대한 도지사의 관여를 명확히 하고, 불량교사를 철저히 제거하는 한편, 학교운영의 효율화를 도모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5. 그에겐 자유와 인권과 관한 인식이 크게 결여되어 있고, 국가 혹은 집단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모든 개인을 집단에 맞추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의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재”라는, 리더십에 관한 하시모토의 발언이나, ‘공무원 기미가요 기립제창 조례’는, 그의 전체주의적/권위주의적 의식이 꽤 위험한 수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조례의 정식 명칭은 ‘오사카부의 시설에 설치된 국기의 게양과 교직원에 의한 국가의 제창에 관한 조례’. 교직원들에게는 기미가요 기립제창의 의무가 부여된다. 비록 이 조례는 처벌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기미가요에 대한 기립제창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할 수 없고, 이에 대한 징계 근거를 만들었다는데 의미가 있다. 지난 2월 말, 조례 이후 처음 있었던 졸업식에서 6개 학교에 8명의 기립제창 거부 교사가 있었고, 오사카부의 교육위원회는 이들을 직업명령 위반으로 징계 처분할 방침을 밝혔다. 6

게다가 3월 2일에 하시모토 시장은 시 직원의 문신을 금지하는 복무규율을 만들도록 담당부국에 지시했다. 발단은 지난 10월, 한 아동사회복지시설의 남성직원이 성희롱 혐의로 정직 2개월의 징계처분을 받은 일이었다. 해당 직원은 시설 내 아이들에게 자신의 팔에 그려진 문신을 보이며 큰 소리를 내는 등의 행위를 했다 (문신을 보이며 겁을 주었던 것이 아닐까). 이에 대해 하시모토씨는 “문신을 한 상태로 정규직원이 될 수 있는 업계가 공무원 이외에 있는가”라는 발언을 하며, 문신을 지우는 시술을 받게끔 하는 방안도 제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7 이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주장인데, 애초에 문신에 대한 부정적 가치판단은 하시모토 개인의 것일 뿐이며, 문신을 한 사람은 공무원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주장도 그 논리가 대단히 조악하다. 게다가, ‘문신을 할 자유’를 강제로 빼앗고 이에 대해 제거 시술을 받게끔 강제한다고 하는 발상은, 인권, 특히 신체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볼 때 대단히 몰상식하다.

이런 하시모토와 오사카 유신회의 행보는 당연하게도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비판자 중 한 명 (홋카이도 대학 야마구치 교수)은 그를 파시즘에 빗대어 “하시즘”이라는 표현까지 만들어냈다. 오사카에서 열렸던 집회에서는, 야스쿠니 문제 등 국가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지속적으로 피력해온 철학자 타카하시 교수가 “하시모토 지사의 교육기본조례안은, ‘교육파괴기본조례’라고 말해야만 한다” “지사를 천황으로 하는 천황제라고도 할 수 있는 오사카부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라며 그를 강하게 비판했다. 8 테즈카야마가쿠인 대학의 야쿠시인 교수는 그를 “양립할 수 없는 군대식 관료주의와 시장원리주의를, 때와 장소에 맞춰 나눠 말한다. 주민을 대체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는가”라며 비판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인권과 교육 문제 그리고 헌법 9조에 관한 하시모토의 사상에 대한 수많은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그와 오사카 유신회는 인기가 있다. 지난 2011년 11월, 부지사를 관두고 시장선거에 출마하여 다시 시장이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하시모토의 지지율은 나쁘지 않다. 지난 2월 11일, 12일 아사히 신문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다음 중의원 선거에서 오사카 유신회가 국회에서 영향력을 가질 정도의 의석을 확보했으면 한다는 대답이 무려 54%에 이르렀다. 9 하시모토와 오사카 유신회는 결코 “극우 꼴통” 수준의 대접을 받고 있지 않았다. 2008년 그의 지지율은 80%에 육박한 적도 있었다.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반응을 봐도, 하시모토의 인기를 알 수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 네티즌들의 우경화는 뚜렷히 나타나고 있는 현상인 것을 감안해도 꽤 높은 인기다. 특히 헌법 개정이나, 기미가요 반대 교사에 대한 징계 기사에서는 그의 지지 댓글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그에 대한 인기에 대해, 아사히 신문은 하시모토의 주 비판자인 몇 사람을 취재하여 이유를 물었다. 야마구치 교수 (정치학)는 “기성 정당이 침체된 가운데 정치의 축이 보이지 않으니, 기대가 높아졌다”고 분석한다. 같은 홋카이도 대학의 나카야마 준교수 (정치학)은, “동일본대지진으로 정부에 대한 신뢰는 사라지고, 불안한 마음을 안은 국민에게서 ‘구세주대망론(救世主待望論)’이 나오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말한다. 정신과의사 카야마 씨는 “흑백으로밖에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은, 큰 불안을 안게 되는 경우가 있다.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정치가가 지지를 얻는 것은, 유권자가 불안정한 상태에 내몰리고 있기 때문인 것은 아닌가”라고 분석한다. 10

 

2.

“하시즘”이라는 표현을 봐도 알 수 있듯, 오사카시와 일본 사회를 보면 전형적인 파시즘의 특징들이 드러나고, 과거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가 대중의 지지를 얻게 된 과정이 현대 일본에 놀랍도록 잘 맞아 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사회는 제 2세계 대전과 패전에 대한 트라우마와 히스테리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일본의 우익 세력들은 끊임없이 지난 날을 정당화하며, 일본이 천황을 중심으로 단결할 것과 자위대 이상의 무장 세력을 갖출 것을 요구한다. 만약 그들이 패전하지 않고 독일과 함께 세계를 제패했다면, 국제사회와 역사에서 지금과는 전혀 다른 위상을 갖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이는 미국이나 타 유럽 국가들에 대한 열등감에 다름 아니다.

3.11 지진재해 이후 일본의 TV에는 ‘힘내자, 일본’ ‘우리는 할 수 있다’ ‘동일본을 응원하자’ 등, 집단의 힘과 협력을 강조하는 선전이 쏟아졌다. 끊임없이 단결을 강조했고, 지진재해가 일어난지 1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동북 지방에 대한 TV프로그램은 협력과 인연, 맺어짐만을 강조하는 대단히 감정적이고 단편적인 형태를 띤다. 물론 그들의 고통에 감정적인 동조를 보이고, 공감하고 해결을 위해 단합하는 건 물론 필요한 일이지만, 문제는 지진재해의 본질이 이런 선전들로 인해 가려졌다는 데에 있다. 핵 발전의 안전성과 효율에 대한 본질적 의문, 정부의 대처 방식과 재정 상황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제기하지 못한채 감정적으로 동북지방을 구해야 한다는 공허한 외침만이 가득한 것이다. 결국 동북지방의 사태를 수습하는 데 있어서의 정부의 역할보다 국민의 집단적 역할이 강조되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정부에 대해 확실한 책임 추궁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국민들은 갈 길을 찾을 수 없고, 이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진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지난해 말, ‘국가에 위협이 되는 정보를 유포하는 자’에게 최대 징역 10년을 선고할 수 있는 “비밀보전법”을 국회에 제출하는 등, 사건과 관련해 투명한 정보를 제공하기는 커녕 지속적으로 정보를 은폐하고 축소하려 했다. 이런 일련의 모습들은 국민이 정부를 신뢰할 수 없게 만들었고, 특히 최근 제기되고 있는 “4년 내 대지진설” 등은 안 그래도 방사능 때문에 불안한 일본 국민들을 더욱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르크스 주의 이론가인 탈하이머나 바이다에 따르면, 자본과 노동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기성의 정치판을 갈아엎는 제 3의 세력이 등장하는데, 그 실례가 파시즘이다. 11 여기서 말하는 “자본과 노동의 대립”을 일본 사회에 적용하기 위해 “정부와 시민” 혹은 “자민당과 민주당” “원전 찬성파/반대파”로 치환한다면, 기성의 정치판을 갈아엎는 제 3의 세력은 하시모토 시장이 소속하는 “오사카 유신회”에 해당하게 될 것이다.

오사카 유신회의 인기에 기여하고 있는 것은, 위에서 야마구치 교수나 나카야마 교수가 지적했듯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다. 50년 넘게 여당으로서 일본을 지배해오던 자민당이 투표로 물러가고, 민주당으로 교체되었지만 사실상 일본 사회가 변화된 부분은 없다. 적어도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이번 원전 사고에 관해, 민주당 내각의 무능함이 드러나고, 재정상태가 지속적으로 악화됨에 따라 민주당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감은 계속 커져만 갔다. 문제는, 두 거대 정당인 자민당이나 민주당을 대체할만한 세력이 일본 정치판에 딱히 없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의 정치 생태계와도 비슷한데, 두 거대 정당이 버티고 있는 이상 다른 야당들의 힘은 미미해질 수밖에 없고, 국민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두 정당은 항상 다수석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오사카 유신회와 하시모토 지사가 등장한 것이다.

하시모토는 보수 우파였지만, 관료기구와 관련된 그의 정책은 대단히 개혁적 (그리고 급진적)이었다. 이 글의 첫 문단에서도 말했듯, 그는 정보 공개실을 설치하고 공무원의 규모를 크게 줄였으며, 공무원 임금도 큰 폭으로 깎았다. 정보 공개실을 설치함으로 인해 오사카의 정보 투명도는 하위권에서 한번에 최상위권으로 뛰어올랐다. 공무원은 절반을 해고하거나 민영화할 방침임을 밝혔으며, 공무원 임금도 30% 이상 삭감될 예정이다. (버스 기사들의 임금은 이미 큰폭으로 삭감되었다) 이는 현 민주당 일본 정부와는 전혀 반대되는데, 앞서 한 언급에서 알 수 있듯 일본 정부는 지진재해가 발생한 이후 정보 통제를 지속적으로 시도했으며, 재정 상태 악화에 대한 뾰족한 방책을 아직까지도 내놓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방정부 하나에 대한 정책을 수립하는 것과 한 국가 전체를 다루는 건 전혀 다른 문제지만, 정보에 대한 투명성, 결단력, 행동력에서 하시모토는 민주당 정권을 압도한다. 게다가 그에게는 청렴이라는 이미지까지 덧붙여져 있다. 기성 정치에 신물이 난 국민들에게 있어 하시모토가 매력적인 이유다.

오사카유신회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다시 보자. 사람들을 철저히 통제하고, 국가와 집단의 가치를 강조하는 정책들을 하나하나 쏟아내고 있다. 그 일련의 정책의 성격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것이 기미가요 기립제창 조례이다. 그들은 강력한 규제와 통제를 이용하여 불확실성과 불안 요소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 있다. 문제는, 그런 식의 통제는 반 헌법적/ 반 인권적인 시대적 역행인데다가 시민들의 불안의 본질적 부분을 아무것도 해결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보수 우파의 권력 기반은 ‘불안’이다. 이는 일본, 한국, 미국, 어디서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적’을 창출해냄으로서 권력기반을 유지하고, 개인의 권리를 제한하는데 대한 정당성을 확보한다. 1930년대에 히틀러는 독일인들이 유대인들과 집시들을 두려워하도록 유도했다. 미국에서는 한동안 소련이 그 역할을 맡았고, 2000년대에 들어선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중동지역의 국가들이 미국의 적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해방 이후 줄곧 북한 (그리고 “공산주의” 이념)이 그 역할을 해왔다. “빨갱이”라고 말하면 인권 유린이 정당화되었다. “국가 안보를 위해”서라고 말하면 반인권적 행위가 서슴없이 이루어져도 반대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일본에서 그 ‘적’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은 “국가 안정성과 아이들의 교육을 위협하는, 애국심 없는 공무원”이다.

오사카 유신회의 이런 프레임 설정은 꽤 성공적이다. 하시모토의 기미가요 기립 조례나 문신 금지 정책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동조한다. “그들은 우리들의 세금으로 먹고 사는 공무원이자, 학생들의 교육을 책임지는 교사다. 기미가요를 제창하지 않는다는 반국가적 사상을 학생들에게 주입함으로서 국가를 불안하게 한다” “학생들의 교육을 책임지는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부정한 영향을 줄 우려가 있다면 통제하는 게 맞다”는 식이다. 여기에 헌법에서 보장된 사상/양심의 자유나, 신체의 자유와 같은, 보다 높은 수준의 가치에 대한 고찰은 전혀 담겨 있지 않다. 이런 일련의 논리에서 교사로 대표되는 개인은 국가와 집단의 거대 가치와 질서를 훼손시키지 않을 의무를 지닌 존재로 평가절하되어버린다. “교사가 세금을 먹는 이상 국가를 제창하는 것은 당연하다!” 헌법에서 보장되는 여러 자유들은, 일본 사회에서는 꽤나 먼 얘기인 것처럼 느껴진다.

 

 

3.

오사카 유신회에 대한 지지는, 3.11 지진재해 이후 나타나는 파시즘의 한 경향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일본의 전체주의화 경향은 다른 부분에서도 관찰된다. 2012년 3월 11일, 그러니까 지진재해가 일어난지 딱 1년이 되던 일요일에, 일본 트위터에선 대단히 희한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웃기는 내용의 트윗을 올리던 사람들에 대해, 일부에서 “불근신 (不謹慎)이다”라는 비난이 나온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던 이 날에 어떻게 그런 경박한 트윗을 할 수 있냐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3월 11일이 생일인데 친구로부터 “이런 날에 생일을 축하하는 것은 불근신 아니냐”라는 말을 듣고, 이 날 태어난 것도 죄냐며 하소연하기도 했다.

개인의 자유나 권리에 대한 의식이 대단히 빈약한 일본 사회는, 그만큼 전체주의의 함정에 쉽게 빠져들 수밖에 없다. 이는 세계 2차 대전 전의 “멸사봉공 (滅私捧公)”의 잔재가 아직까지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수도 있다. 개인을 희생하여 사회에 바친다는 이런 이데올로기는 전후의 따라잡기 정책에서도 기업에 모든 걸 희생하며, 심지어 과로로 죽어가면서까지 일을 했던 비극적인 현상을 불러오기도 했으며, 12 집단에 더 이상 필요한 존재로 여겨지지 않거나 잘 맞지 않는 개인을 철저히 잘라내버리는 이지메 현상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게다가 인권이라는 가치에 대한 고찰이나 교육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심지어 ‘개인의 가치와 책임’을 다뤘던 전후의 교육 기본법을, 일본 전교조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치부해버리기까지 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한 반동이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까지의 관리교육 강화로 나타났고, 90년대 이후의 이지메와 학급 붕괴를 낳았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13 불근신 해프닝도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들이 이렇게 생각하니 모두가 이렇게 생각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이건 모두에게 이익이다”라는 오만한 착각이, ‘슬퍼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집단적 분노’로 표출되는 것이다. 집단의 폭력이다.

한국이 총칼을 든 정부에 의해 ‘강제로’ 사상을 억압받았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면, 일본은 보다 교묘한 방식으로 사상을 통제받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앞서 말한 ‘멸사봉공’이 그 예다. 전후 피폐해진 나라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패전국 일본은 미국에게 많은 간섭을 받았고, 이에 따른 피해의식이 없지 않다. 국가를 재건하고, 빠른 경제 성장을 일구는 가운데 국민들은 ‘선진국 일본 국민’으로서의 가치관을 내면화했다. 그리고 일본이 그토록 빠른 성장을 이룬 이유는, 다름아닌 일본인의 ‘높은 단결력’, ‘높은 충성도’, ‘높은 근면성’ 등이라고 (사실이 어떻든간에) 믿게 되었고, 이런 ‘미덕’이 현대 일본 사회의 집단주의를 강화한 듯하다. 미국의 개인주의 사상이 보다 늦게, 얕게 들어오게 된 것도 이런 맥락이 아니었겠는가. 결국 개인을 억압하게 된 주체는 한국의 국가보안법 같은 인위적인 수단이 아닌, 사회 구성원 개개인들이었던 셈이다.

안타깝게도, 집단(국가)의 공 (公)이 국민 개개인을 위한 공공 (公共)과 일치할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국가 혹은 집단의 이익과 개개인의 이익은 일치하지 않는다. 집단을 위한 노력이 결과적으로 개인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과정에서 공리를 위해 희생되는 개개인의 경제적, 사회적 가치를 생각해보면 썩 기분이 좋을 수는 없다. 특히 지금과 같은 경우, 즉 집단을 위해서 개인의 인권, 즉 사상의 자유나 양심의 자유가 희생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는 경우, 집단의 이익은 개인의 이익과는 더더욱 괴리되고, 개인이 감수해야 할 희생은 더욱 더 커진다. 이는 결코 건강한 사회라고 볼 수 없고, 분명히 올바르지 않다. 하지만 일본 사회에서의 이런 경향 – 집단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필연으로 보는 경향 – 은 점차 증대하고 있다. 나는, 심지어 개인의 감정까지 집단의 힘으로 제약하려고까지 하는 이런 경향이 대단히 두렵다.

 

 

3.

앞서 말했듯, 3.11 지진 이후 일본의 TV에는 ‘힘내자, 일본’ ‘우리는 할 수 있다’ ‘동일본을 응원하자’ 등, 집단의 힘과 협력을 강조하는 선전이 쏟아졌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것들은 국민의 시선이 사건의 본질을 향하지 못하게 주위를 돌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정부는 “비밀보전법”을 국회에 제출하는 등, 사건과 관련해 투명한 정보를 제공하기는 커녕 지속적으로 정보를 은폐하고 축소하려 했다. 이런 일련의 모습들은 국민이 정부를 신뢰할 수 없게 만들었고, 특히 최근 제기되고 있는 “4년 내 대지진설” 등은 안 그래도 방사능 때문에 불안한 일본 국민들을 더욱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런 가운데 개인의 가치보다는 국가와 전체 집단의 가치를 중요시하고, 어떤 ‘유능한’ 지도자에 복종하는 것으로 개인의 불안과 불확실성을 해소하는 파시즘이 대두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지난 2008년 경제 위기때 유럽에서 갑자기 파시즘이 인기를 얻었던 것과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일본에서의 파시즘은 심상치 않다. 2월 28일, 자민당은 헌법개정원안을 작성하고 이를 발표했는데, 이에는 천황을 ‘원수’로 하고, ‘자위군을 창설’하고, 수상에게 ‘긴급사태’를 선언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등, 보다 권위적이고 국가주의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14. 지금 일본은 마치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체주의 국가로 회귀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 대단히 강하다. 무서울 정도다.

인권보다 국가의 가치가 우선하고, 집단을 위해 개인의 가치가 희생되는 것이 당연하게 되는 순간, 군국주의의 망령은 되살아날 것이고 재앙은 반복될 것이다. 하시모토는 이러한 부정적 변화의 상징 같은 인물이다. 개인의 권리, 개인의 가치, 자유와 인권, 국가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보는 것. 불안에 휩싸인 일본 국민들이 전체주의의 마약으로 정신을 잃지 않으려면, 국가보다 우선하는 가치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 그리고 자각이 필요할 것이다. 국민들이 언제 하시모토와 오사카 유신회가 지닌 큰 문제와 자신들이 포기해왔던 것을 권리들을 발견하고 되찾는지, 나는 더 지켜볼 생각이다.


학생인권조례: 성소수자 차별금지의 당위성

0. 

    매춘에 대한 찬반이나 여성 인권 문제 등, 우리 사회에는 온갖 “성”에 관한 쟁점이 끊이질 않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사회적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표류하는 건 “동성애”와 관한 문제다. 

    사실 동성애를 허용해야 하냐, 막아야 하냐에 대한 논쟁은 전혀 무의미하다. 동성애는 허용하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냥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이 밥을 먹고 숨을 쉴 권리를 남이 부여해주지 않듯, 동성애를 할 권리는 누구로부터 인정받는 게 아니다. 동성애, 동성간의 사랑에 왜 타인의 허락이 필요한가. 인간이 인간을 사랑할 권리를 감히 누가 제한할 수 있겠는가. 사실은 동성애 허용의 당위를 논하는 것 자체가 그리 생산적인 일은 아니다. 동성애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을만한,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을 제한할만한 대단한 논리적이자 합리적인 근거가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겠는가. 애초에 굳이 논할 가치가 없는, 자명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1.

    지난 1월에 공포된 곽노현 교육감의 서울시 학생인권조례에 담긴, “성적 지향”에 대한 차별 금지 조항 때문은 ‘동성애’라는 이슈를 다시 떠오르게 만들었고, 동성애 혐오자, 즉 호모포비아들이 동성애에 대해 도대체 어떤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 다시금 느낄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먼저 서울시 학생인권조례에 들어가 있는 조항들을 살펴보자. 

 

제 2장 학생의 인권
     제 1절 차별받지 않을 권리
           제 6(차별받지 않을 권리)   ① 학생은 성별, 종교, 나이, 사회적 신분, 출신지역, 출신국가, 출신민족, 언어, 장애, 용모 등 신체조건, 임신 또는 출산, 가족형태 또는 가족상황, 인종, 경제적 지위, 피부색,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병력, 징계, 성적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

제 4절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및 정보의 권리
            제 13조(사생활의 자유 및 사생활의 보호를 받을 권리) ① 학생은 사생활의 자유 및 가족, 교우관계, 성적, 병력, 징계기록, 교육비 미납사실, 성적지향ㆍ성정체성 등의 개인 정보(이하 “개인 정보”라 한다)를 보호받을 권리를 가진다.

제 10절 소수자 학생의 권리 보장
             제 28(소수자 학생의 권리 보장)   ① 교육감, 학교의 설립자·경영자, 학교의 장 및 교직원은 빈곤 학생, 장애 학생, 한부모가정 학생, 다문화가정 학생, 외국인 학생, 운동선수, 성소수자, 근로 학생 등 소수자 학생(이하 “소수자 학생”이라 한다)이 그 특성에 따라 요청되는 권리를 적정하게 보장받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④ 교육감, 학교의 장 및 교직원은 특히 성적지향과 성별 정체성에 관한 정보를 본인의 동의없이 보호자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에게 누설해서는 아니되며, 학생의 안전상 긴급성을 요하는 경우에도 본인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해야한다.

 

    이상이 “성적 지향”과 관련된 부분을 다룬 부분들인데, 솔직히 말하면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 제 2장 제 1절은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명문화한다. 이에는 “성별 정체성” “성적 지향”이 포함되고, 학생은 이 이유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 제 4절에서는 성적지향, 성정체성의 개인정보를 보호받을 권리를 갖고, 제 10절에선 성소수자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할 것과 요청되는 권리를 적정하게 보장할 것을 명기하고 있다. 인간으로서 자신에게 필요한 권리를 요구하고, 비밀을 보장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어떤 인간에게나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자격이 주어진다. 위의 조항들은 이런 당연한 사실들을 글로 옮겨놓은, 지극히 건전한 조문들 뿐이다. 이에 대체 어떤 정치적인 의미가 들어가 있다는 말인가. 이에 대체 어떤 ‘이념’이 들어가 있다는 말인가. 여기에 적혀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인간의 권리뿐이다. 이를 부정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부정하는 행위와 다름 없지 않겠는가.

    중앙일보는 지난 10월 20일, “학생인권조례에 ‘동성애’ 끼워 넣은 교육청”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1 첫 문단은 “서울시교육청의 학생인권조례 자문위원회가 ‘동성애(同性愛)’를 허용하는 조항을 조례안에 포함시켜 논란이 일고 있다.”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제목부터 묘한 느낌을 풍긴다. 첫 문단의 첫 문장도 이상하다. 동성애를 ‘허용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처음에도 말했듯 동성애는 누가 허용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이는 마치 원래 동성애가 금지되어 있었다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학생인권조례의, 성적 지향 부분에 대한 반대 의견으로 가장 황당하고 재미있는, 그리고 주가 되는 이유는, ‘성적 지향에 대한 차별 금지는 학생들의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이는 몇 가지 이유로 재미있는데, 첫째가 ‘차별 금지’가 ‘동성애 조장’으로 연결되는 황당한 귀결이고, 둘째는 ‘동성애’에 대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부정적인 가치판단이다. 

    첫번째에 대해서는 언급할 가치도 없다. 동성애에 대한 차별이 사라진다고 해서, 이성애자가 갑자기 동성애자가 되겠나. 그건 처음부터 양성애자였거나 혹은 동성애자였지만 이성애자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숨기고 왔던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건 나쁘기는 커녕 대단히 긍정적인 일이다! 당신이, 오직 주변의 시선과 평가 때문에 조금도 사랑을 느끼지 않는 상대들만을 찾아다녀야 한다고 생각해보아라. 이는 불행일 뿐이다. 동성애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것은, 동성애자들을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게 할 수 있는 길이고, 이는 동성에게 사랑을 느낀다는 이유만으로 근거없는, 그리고 부조리하고 비상식적인 대우를 받던 동성애자들의 삶의 질 향상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그리고, 이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은 단연코 아무도 없다. 

    두번째,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 가치판단’인데, 사실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은 어디까지나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이지, 동성애 자체의 속성과는 무관하다. 실제로, 중세시대에는 공공연히 동성애가 행해지기도 했다. 이는 동성애에 대한 가치판단이 어디까지나 사회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현대에 쌓아 올려진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인 가치판단에는, 종교적인 배경과 생물학적인 배경이 동시에 들어가 있다. 

 

2. 

    동성애를 금지하는 대표적인 종교는 기독교이다. 성경, 특히 구약에는 동성애가 죄악이라고 명기되어 있고, 여러 부분에서 동성애나 남색에 관한 부분이 나온다. 기독교인들의 주장은 간단하다. ‘하나님 (하느님)이 동성애를 죄악이라고 했고, 이는 성경에 나와 있으며, 따라서 동성애는 금지되어야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이는 어디까지나 해석의 문제다. 구약에서 몇 번 나오던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는, 신약으로 가면 대단히 찾아보기 힘들어진다. 심지어는, 성경 텍스트를 토대로 예수가 남성과 성적 관계를 맺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애초에, 세상의 옳고 그름을 성경으로 가린다고 하는 발상 자체가 틀렸다. 성경에 나오는 규범들을 다 따르려면,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기가 대단히 힘들 것이며, 현대의 법률조차 어기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돼지고기를 안 먹고,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는 기독교인이 있던가?) 성경에 나온 다른 규범들은 다 ‘현대적으로’ 해석하면서, 유독 동성애에 관한 부분만 ‘보수적’으로 해석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게다가, 어디까지나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영역 안에만 존재하는 성경 속의 규범을, 대체 왜 모든 세상 사람들이 강요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성경을 근거로 동성애를 잣대질하려는 행위는, 대단히 오만하다고밖에는 볼 수가 없다. 

    동성애는 생식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부정적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 또한 납득하기 어려운데, 인간에게 있어서 섹스는 생식만을 위한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섹스는 인간과 인간이 가장 친밀한 형태로 감정을 공유하는 행위이자, ‘성욕’을 해소하고 쾌락을 맛보는 행위이기도 하다. 심지어 다른 동물조차 스트레스 해소 등을 목적으로 동성애를 하는 가운데, 섹스의 생식 기능만 강조하여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게다가 아이를 낳지 않는 것으로 동성애를 비난한다면, 수녀들이나 신부들, 혹은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들도 다같이 비난받아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동성애가 에이즈의 주 전염로라는 것도 이미 철이 지난, 하지만 아직까지도 계속해서 끊이지 않고 이용되는 논거다. 동성애를 하든 이성애를 하든 HIV 보균자와 (적절한 안전장치가 없는) 성적 접촉을 하면, HIV 바이러스는 전염될 확률이 대단히 높다. 에이즈가 전염되었다면, 그것은 섹스의 문제이지, 동성애의 문제는 아니다. 

    동성애의 부정적 가치판단은 이런 배경들에서 그치지 않는다. 동성애의 반대 이유로 ‘음란하다’ ‘퇴폐적이다’ 라는 점을 드는 경우가 꽤 있다. 학생인권조례를 통해 동성애가 양지로 나오게 되면 (음란한) 동성애를 하게 된 학생들이 ‘타락할 것’이라는 거다. 그치만 이 또한, 당연하게도 근거는 없다. 이성간에도 이른바 ‘음란하고 퇴폐적인’ 성행위를 하는 경우는 셀 수가 없다. 또한, 동성애자가 항문 성교를 한다고 해서 그게 더럽거나 음란한 것은 아니다. 이성간에도 항문 성교를 하는데, 그것도 금지해야 한다고 하려나. 추가로, 동성애가 음지에서 음란한 성행위를 하는 퇴폐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데에는, 동성애를 금기시하고 내쫓으려 했던, 기독교를 비롯한 사회의 책임도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3. 

    학생인권조례의 성적 지향 부분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동성애에 대한 혐오를 너무나도 거리낌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솔직히 충격적이다. ‘호모포비아’라는, 반인륜적이고 비인간적인 태도를 그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당당하게, 아무 문제 의식 없이 떠벌이고 다닌다. 그리고 주변의 공감을 산다. 인간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게 당연한 사회, 그게 지금의 한국 사회다. 

    이런 발상이 무서운 건, 그게 ‘생각’만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동성애 혐오는 동성애자들에게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실질적인 피해를 준다. 인간의 가치에 차이가 있음을 규정하려는, 너무나도 당당한 호모포비아들을 보면 한때 열등한 민족은 지구에서 청소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실제로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학살했던 옛 독일의 나치들이 떠오른다. 그들도 호모포비아들이 동성애자들에게 갖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유태인들은 차별당해 마땅한, 열등한 존재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렇게 역사는 가장 비참하고 잔인한 시기를 맞았다. 

    지난해 12월 초, 서울대에서 ‘반 동성애’를 의미하는 ‘졸업작품’이 문제가 되었다. 서울대 동성애자 동아리 QIS는 ‘레즈가 어때서?’ ‘게이가 어때서?’라는 포스터를 게시판에 붙였는데, 여기에 ‘How could your life be created?’ 라는 문구와 함께 남성과 여성의 결합을 의미하는 이미지의 스탬프를 서울대 미대 학생이 찍어놓고서, 이를 <이성애 권장-반동성애 캠페인>이라는 제목으로 출품한 것이다. 2 기독교인이었던 해당 학생은 자신의 행동이 ‘선의’라고 주장했지만, 그 학생이 어떻게 생각해서 그런 행동을 했던간에, 그것은 명백한 사회적 ‘해악’이다. 그 학생은 자신의 편협하고 짧은, 대단히 미성숙한 유아적 판단으로 타인의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짓밟는 행위를 해버린 것이다. ‘우수 혈통만을 남기기 위해서’라는 ‘선의’로 유태인 학살을 자행했던 나치스 독일과 저 학생이 과연 다를 게 있을까.

    UN에서는 지난해 여름, ‘동성애 차별금지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또한 반기문 의장은 지속적으로 각국에 동성애의 권리를 인정하는 법안을 만들 것을 촉구해왔으며, 지난 12월 8일에는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도덕적 폭력이고 중대한 인권침해이며 공중보건의 위기”이며, “국제인권법에 따라, 모든 국가는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이유로 한 것을 포함하여 폭력과 차별로부터 모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반드시 취해야 한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발표했다. 3  2011년 11월에 나온 성적 지향으로 인한 차별에 관한 유엔 보고서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성적 지향과 성적 정체성을 근거로 일어나는 모든 종류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이를 예방, 해결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4 힐러리 클린턴은 지난 12월 10일, 세계 인권의 날을 맞아 성 소수자의 인권 옹호를 위해 미국이 앞장서겠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5 미국 오하마 주에서는 오늘 (2012년 3월 28일)부터 성적 지향을 이유로 차별할 수 없게 하는 조례가 발효되었다. 6

    세계는 인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차별을 철폐하는 쪽으로, 인간과 인간을 더욱 평등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세계는 이미 역사속에서 대단히 비싼 값을 치러가며 학습했다. 타자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타인의 차별을 제멋대로 합리화한다면 어떤 참혹한 결과가 발생하는가. 그리고 차별과 폭력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결국은 어떠한 최후를 맞는가. 한국의 호모포비아들은, 특히 박애주의를 실천해야 할 기독교인들은 아직도 이런 간단한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4. 

    마지막으로, 다시 학생인권조례로 돌아가보자. 학생인권조례의 성적 지향 부분이 맘에 안 든다면, 먼저 당신과 동성애자들은 똑같은 인간이며, 똑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보자. 그리고, 인간으로서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 불합리한 이유로 타인의 행복을 제한하고 탄압할 것인가, 혹은 그들의 권리를 있는 그대로 존중할 것인가 – 를 먼저 생각해봐야할 것이다. 

    다른 인간의 권리를 자신의 권리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과연 동성애자들이 동성애를 할 권리를 그렇게 쉽게, 가벼이 여길 수 있겠는가. 동성애자들의 권리에 대한 존중은 곧 당신 자신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며, 당신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는 길이다. 동성애자는 결코 남이 아니다. 바로 당신이고, 우리들 모두이다. 

    이런 면에서, 학생인권조례에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금지 조항이 들어가는 것은 마땅한 일이며, 이를 통해 추악하고 저질스러운, 비인간적이고 비합리적인 차별들이 이 땅에서 사라질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 그리고 평생 머릿속에 심어줘야 할 것은 ‘차별’과 ‘혐오’가 아닌, ‘공존’과 ‘존중’이다. 



Footnotes:

  1. 중앙일보, “학생인권조례에 ‘동성애’ 끼워 넣은 교육청, 2011.10.20,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6460798&cloc=rss%7Cmost_view%7Csociety . 
  2. 시사in, “서울대 미대 동성애 혐오작품 논란”, 2012.1.12,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2051 
  3. 반기문,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에 근거한 폭력과 차별 근절 행사에 보내는반기문 사무총장의 메시지”, 2011.12.8, http://www.tongcenter.org/nondiscrim/sogi/ban2011  
  4. “유엔인권고등판무관 보고서 –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이유로 한 차별적 법과 관행 및 개인에 대한 폭력적 행위”, 2011.11.17, http://www.tongcenter.org/nondiscrim/sogi/ohchr19_41 
  5. 힐러리 클린턴, “세계 인권의 날 기념 연설”, 2011.12.10, http://www.tongcenter.org/nondiscrim/sogi/hillary11 
  6. Human Rights Campaign, “Omaha’s Non-Discrimination Ordinance Takes Effect Today”, 2012.3.28, http://www.hrc.org/blog/entry/omahas-non-discrimination-ordinance-takes-effect-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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